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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로움을 찾아..

키메라

by 해슬기 2009. 10. 12.

팝송을 즐겨 듣던 내가 군대 제대하고 방황할때

클래식에 조금이나마 빠져들게 했던 계기의 음반이다

 

레코드판이 있으면서도 테입에 녹음해서 줄창 듣고 다녔다

그래서 오페라의 원곡을 찾게되었고 또 다른 곡들을 고생하며

들었었다

 

팝페라 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으며

쉽게 클래식에 접근하도록 도와준 계기였다

 

지금도 뭐 별로 깊이 없이 기웃거리는 정도지만

내 음악 취미중 다른 장르를 이끌어준 앨범이다

 

많은 앨범이 유실(?)되었지만 이 앨범은 군 제대 후 구입한지라

잡음은 나지만 아이들 키우면서 망가지지 않고 목숨 건진 경우다

 

 

 

Kimera


The Lost Opera side 1 (14:40)

The Blue Island


팝페라의 효시 키메라

키메라는 'Kim + Opera'라고 합성해서 만든 예명으로 그녀의 한국 이름은 김홍희다.

그녀는 서울 동덕여고 졸업 후 프랑스로 유학, 1984년에 프랑스 파리 제7대학을 졸업하여 유학중에 만난 레바논의 거부 레이몬드 나카치안씨와 결혼하여 프랑스로 귀화하였다.

키메라(Kimera)라는 이름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음악스타일은 비록 시기가 매우 빠르긴 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새로운 음악 시장의 가능성을 미리 예측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1985년에 키메라의 "더 로스트 오페라" 라는 '오페라 아리아 모음' 앨범을 발매하면서

그 앨범이 프랑스 전역을 강타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당시 프랑스 유력지 르몽드지가 1면 톱으로 내보낸 헤드라인 기사에서 "한국에서 온 팝페라의 여왕" 이라고 칭해, 오늘날 팝페라라는 명칭을 가장 먼저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The Lost Opera side 2 (16:54)

당시 그녀의 인기는 유럽을 강타하여 골든, 플래티넘을 넘을 정도였으며 실제 당시 유럽 성악가들은 잊혀져가는 오페라를 다시 살렸다고 키메라에게 공공연히 감사를 표했을 정도였다.

그녀의 음반은 팝페라임에도 불구하고 런던 심포니와 함께 작업을 하는 등 여러 가지면에서 음반 자체의 완성도가 높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게도 이것은 상업적인 음반 출반의 목적이 아니라, 엄청난 거부였던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대학졸업과 딸 멜로디의 출산에 대한 축하선물로 만들어 준 것이었다.

원래 정통 오페라 앨범을 녹음할 계획이었으나 남편이 락 애호가였기에 이에 맞춰 편곡했고 그녀는 별로 맘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녹음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당시 거물급의 지휘자와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정통 클래식이 아닌 락리듬을 연주했다는 것 자체가 금세 언론의 뉴스 거리가 되고 곧 이어 밀려드는 상업적 음반의 출반 요청에 따라 음반을 내놓았는데 결과는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그녀의 앨범은 프랑스 음반 차트의 톱을 단숨에 거머쥐었고, 온 유럽이 온통 락오페라 열풍에 빠지게 되었으며, 또 키메라는 원래 계획에는 없던 가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연이어 내놓은 3장의 음반이 연속 대박이었다.

그녀가 음반을 내고 싶었던 이유는 사실 어렸을 적 성악을 하고 싶었으나 광대짓은 절대 못시킨다는 부친의 완고한 고집으로 접었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중견 기업을 운영하는 보수적인 부친은 그녀가 프랑스로 유학을 가는 것도 마땅치 않아 했지만

결국 김홍희는 어렵게 허락을 받고 불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녀의 남편을 통역해 주다가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음악 애호가였던 그녀의 남편은 우연히 사무실 TV에서 나오는 오페라를 따라부르는 김홍희씨 모습에 반하여 청혼하게 되었고, 결국 결혼하면서 그녀는 억만장자의 아내가 된 것이다.

참고로 당시 그녀의 앨범의 제작 비용은 약 25만달러라는 거금이었다.

당시 그녀의 역할은 우리 국민에게 상당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88올림픽 이전이라서 한국이란 나라의 이름도 모르던 유럽인들에게 그녀는 당당하게 한국이란 이름을 널리 홍보 해주었고, 실제로 그녀는 그녀의 짙은 눈썹과 화려한 복식을 우리의 옛 벽화 등에서 나오는 문양과 인물에서 따와 한국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했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은 남편의 스페인 별장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녀 의 유명세와 남편의 부를 노린 납치범들에게 딸이 유괴당하는 사건이 발생, 당시 그때의 충격으로 그녀는 조용히 가정으로 돌아가버렸다.

만약 그녀가 한 가정의 아내로, 어머니로 조용히 살지 않고 계속해서 활동을 해왔다면 오늘날의 팝페라 시장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그 누구도 장담을 못할 것이다.

'팝페라'라는 쟝르를 개척하였고, 우리의 긍지와 자부심을 한 단계 더 올려준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국인 김홍희를' 우리는 쉽게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 양양물치항 활어회센터  에서 퍼왔습니다..